유교가 한국에 전래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한자가 전래한 시기에 더불어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받아들여지고 발전한 유교의 형태를 말하며 들어서서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발전하여 자리 잡아 가게 된다.17세기 후반부터는 도덕의 실천을 중시하는 유교적 예학이 발달하게 된다. 이것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념이라기보다 당쟁과 적대적인 사상을 탄압하는 무기로 사용되며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게 된다. 결국 조선 후기 들어 주자학에 의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경직성이 당시 총체적인 사회모순과 맞물리며 망국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조선 시대에 융성했던 주자학은 고려말 유학자 안향(安珦)에 의해 1289년 고려 충렬왕 15년에 최초로 전래한 후 연구, 보급되었다. 주자학은 신진사대부들이 고려말 권문세족들에 의한 혼란을 개혁하는 과정 중에 이념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급진 개혁파에 의해 개국 된 조선 초기에 유교(주자학)는 사회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고, 비록 억불숭유는 하였지만 포용력 또한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배타적으로 변질되어 갔다. 스스로 근대화하지 못하여 일제강점기란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며 '주자학 망국론'까지 등장하였다. 현대 한국인들은 유교에 대해 '고리타분함' 이나 '망국' 등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은 유교와 불교 도교 이러한 세 가지 사상적 요소를 모두 흡수·구비하여 발전시켜 왔다. 이 세 가지가 동아시아의 사상적 큰 흐름이다. 그중 중국과는 지역적으로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유교 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민족정신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과는 지역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고대로부터 유교 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민족정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교는 중국을 발상지로 하고 그것이 여러 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 사상에 대해서는 문헌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한자 더불어 전래하였다고 추정되며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배출해 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 계급이 경서와 사기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설총은 이두로써 구경(九經)을 설명하였다. 이미 진흥왕 때 화랑 제도를 창설하면서 “효제충신은 나라 다스림의 대요(敎之以 孝悌忠信 亦理國之大要也)”라고 하여 유교 이념을 근본으로 했다. 화랑들이 연마한 것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 경전이었다. 또한 진흥왕 순수비 속에 나오는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修己以安百姓)”란 논어의 구절이나, '충신정성(忠臣精誠)'·'위국진절(爲國盡節)' 등의 단락이 나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으로써 유교 사상이 기초가 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라의 국학(國學) 설립은 682년(신문왕 2년)으로서 교과 내용이 오경(五經)으로 되어 있다. 논어·효경(孝經)을 필수로 하였다. 백제도 거의 같은 시기인 근초고왕 때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으로 《논어》 (論語) 와 《천자문》(千字文)을 전수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유학 사상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을 세워 제자를 교육하였다. 또한 지방 곳곳에 경당을 두어 청년들에게 유교 경전(經典)과 궁술(弓術)을 연마시켰다. 이것은 유교의 경전과 6 예(六藝)로써 국민교육을 실시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유학의 목표는 첫째로 경전과 역사서에 통달하여 정치나 법률의 제도를 잘 알며, 또 그것을 운용할 만한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유교는 안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밖에서 구하였으며,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수단을 위한 것이었다. 국민을 교육하는 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 사상(五經思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었다. 원래 유교에서는 효(孝)의 관념을 중시하거니와 삼국시대에 있어서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그 기반을 확고히 할 뿐 아니라, 국력을 향상하고 국가를 수호한다는 필요성에 의하여 효(孝於家)와 더불어 충(忠於國)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충과 효는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온 한국 유교의 일반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말기의 어지러운 세상을 잘 처리하여 해결하고 통일국가를 형성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국가의 창업이 불력(佛力)과 삼한산천(三韓山川)의 도움으로 된 것이라 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토속적인 신앙과 도교적인 풍수설을 높여 소중히 하였다. 경사(經史)를 널리 보고, 후대의 왕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실제적인 통치 이념에서는 태조 십훈요의 끝부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유교 사상에서 구하였다.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운 것도 유교를 기반으로 인재를 양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4대 광종 때부터는 과거를 시행함으로써 글을 높여 소중히 여기는 풍습이 일어났으나, 사장시부(詞章詩賦)에 관한 제수(製述 명경(明經, 경서의 대목을 외는 일)보다 치중함으로써 경학의 연구는 미약한 상태였다. 제6대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경학박사를 두었다. 최승로의 진언에 따라 국정을 쇄신하였다. 그 후 11대 문종 때에는 최충의 구재(九齋)를 비롯한 사립 학교가 유행하여 이른바 십이도(十二徒)가 일어났다. 경사(經史)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풍이 생겼다. 그러나 최충 이후 200여년간 유교는 부진한 상태였고, 대부분이 시부(詩賦)를 위주로 한 문장학에만 치중하였다. 당시에는 유가(儒家)라 해도 순수하게 유학만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 있어서 당나라 시대의 경향과 같이 유·불도가 혼합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고려말에 이르러, 건국 이래 겪어온 혼란과 문화적인 침체를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이 요청되었다. 1289년 (충렬왕 15) 때에 안향(安珦)이 충렬왕을 따라 대도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하고 돌아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게 하고 문묘(文廟)를 중수하게 하는 등 유학 부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이에 부응하여 일어난 것이 곧 유교의 혁신 운동인 것이다. 또한 주자학(朱子學)은 외적으로 사회적 제도와 규범의 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일종의 비판철학이며, 역사철학의 구실을 하였다.성리학이란 중국에서 한·당(漢唐)의 도불시대(道佛時代)를 거쳐 그것에 대항하여 새롭게 조직·편성된 유학의 이론 체계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원리를 탐구하는 심오한 학문으로서, 종래의 불교사상이나 도가사상(道家思想)에서 추구하였던 형이상학적 요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새롭고 합리적이며, 강한 자주정신을 가진 성리학은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향(安珦)의 문묘개수(文廟改修)와 주자서(朱子書) 최초로 도입하였고 후진의 교육이 발흥하여 성균관을 중심으로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簿)와 같은 유학자를 내었다. 권부는 《주자전서》의 간행을 건의하는 등 모두 정주학 진흥에 공로가 컸다. 백이정은 이 정주학을 연구하고, 수탁은 이때 들어온 정주(程朱)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고려에서 처음으로 역리(易理)의 학문을 전파하였다. 안향의 학문은 이제현·이색에 이어 정몽주·정도전·권근(權近)과 같은 사류(士類)를 배출하였다. 그중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도덕과 경륜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고려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충신으로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불린다. 그러나 현재 《포은집(圃隱集)》에는 약간의 시문(詩文)만 아니라 유학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이색의 제자인 이숭인도 정몽주와 함께 태학 교수로서 유학이 흥하고 발전하도록 힘을 기울였으나 그는 유학자라기보다는 도리어 시인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