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한국 신앙 무속

봄봄82 2024. 3. 8. 17:14

한국에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무속(巫俗), 무교(巫敎) 하는데 한다. 이들은 고유의 관점이 존재하는 말들이다.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무속은 불교학자 기능화가 샤머니즘을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다. 무교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이 처음 사용한 단어이다. 샤머니즘을 기독교, 불교, 이슬람처럼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는 중립적 입장의 종교학자들이 사용한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다.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특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이 있다. 한국의 토착 종교인 무교(巫敎, 영어: Korean shamanism) 또는 무속신앙(巫俗信仰, 영어: Korean folk religion) 혹은 단순히 무속(巫俗)/무(巫)이다. 샤머니즘, 즉 무당으로 불리는 중재자가 신령과 인간을 중재하는 종교이다. 토테미즘적인 성격도 가져 자연의 정령이나 토착 신령을 숭배했고 조상신 등의 귀신을 섬겼다. 북아시아의 몽골, 퉁구스 등지의 퉁가리 좀 등 종교관과 유사점을 가지며 단군 신앙에서부터 기원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무속 신앙은 한국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한민족의 민족 종교로 여겨진다.

무속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종교이다. 고조선 시대를 상징하는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곰과 호랑이가 나오고 천신의 자손 환웅이란 용어가 나온다. 이외에도 태백산, 신단수 등을 신성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애니미즘, 토테미즘 등을 그 시대에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고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당시는 제정일치 사회였으므로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샤머니즘은 지금도 무속의 핵심적인 요소로 남아있다. 고삼 국 시대 삼한과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 여러 국가에서는 제천 의식을 비롯한 여러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솟대나 당산목 등이 이때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새를 하늘과 땅의 중개자로 보는 신앙에서 비롯된 솟대는 새를 꽃은 나무이다. 또한 농업이 철기의 사용으로 발달하고 국가 간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고대 국가들은 백성들을 단합한다는 목적에서 큰 종교 행사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천 의식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서며 유교, 불교와 같은 외래사상의 수용과 건국 시조와의 연관성을 통한 왕권 계승자 의식 확립으로 제천의례의 중요성이 약화한다. 고려시대는 무속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적인 굿 또는 무당이 개입한 제의의 역사가 구체화한 시기이다. 신이 내리는 데는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충선왕 때 내부령(內府令)을 지냈고 충숙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된 강융(姜融)의 누이는 무당이 되어 송악사(松岳祠)에 생활하였다. 공민왕 때 판 술 경부 사가 된 지윤(池奫)의 어머니도 무당이었다. 고려시대에 와서 하늘에 대한 제사가 다시 중요시된다. 고려의 국조 세계 설화에 평나산(平那山) 산신이 등장하는 것을 비롯하여, 산신이 대단히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궁중 의례화된 처용무는 고려시대 무속이 몇 가지 점에서는 근래와 유사한 형태임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무의(巫儀)가 이미 현대의 굿과 같은 구조를 지녔다. 조선 세종 시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가 시작되며 무당들도 도성에서 쫓겨나게 된다. 호구 수에서 대체로 무당의 숫자가 적어서 대규모의 굿을 행하기는 어려웠다고 판단된다. 무당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천민 부류에 속하였으나, 조선 후기의 무당은 주로 양인 신분이다. 영조 시대에는 궁궐에서나 사대부들이 무속을 겉으로는 경시하면서도 속으로는 깊이 믿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영조실록에 있다. 조선 시대 궁행 의례를 무당이 주관하는 전통은 지속되고 있었으나 지배 세력은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무속을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여러 가지 제도와 방법을 통해 노골적으로 무속을 억압하였다. 태백산에서 제의를 맡은 관원은 고려에는 국가가 파견한 관리가 주도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국가 제의에서 제외되며 향리나 민간인이 제의를 주도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탄압이 있었으나 당시 조선인들은 계속 신앙심을 유지해 왔다. 일제가 조선 땅에 일본 신토를 섬기는 신사를 지으며 국사당을 강제로 옮긴 일도 있었다. 조선 후기부터 구국의 성지로 부각되기 위해 시작한 태백산 천제단에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례가 행하여지면서 제의가 천제(天祭)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새마을 운동 때 정부에서 실행한 미신 타파 운동으로 탄압받았지만 이르러서는 오히려 신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 계몽 운동으로 집안과 마을을 결속해 주는 고리는 상당 부분이 없어졌다. 무속신앙이 미신으로 간주하지 않고 제대로 존중받고 전승되었다면 미신으로 인한 많은 사회적 병폐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개인과 가족, 마을의 결속력이 좋아져 사회가 더 살기 좋게 발전하였을 수도 있었다. 광복 이후 세습무들은 조선 시대 때 무당이기 때문에 받던 탄압을 피해, 무당 집안임을 숨기는 일이 많아졌다. 한국전쟁 때 미신과 종교를 금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대한민국으로 옮긴 강신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무당이라고 하면 대부분 강신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아직도 대한민국의 동해안 지역과 호남지역에는 세습무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세습무가 하는 강릉 단오굿과 동해안 별신굿, 진도 씻김굿 등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진도씻김굿을 하는 무당을 진도에서는 단골이라고 한다) 강신무는 일반인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무병을 앓게 되고 내림굿을 통해 신내림을 받아서 신령을 몸조심으로 모시는 무당을 일컬으며, 세습무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소화처럼 집안의 인척 관계로 계승되는 무당을 말한다. 강신무는 대체로 한강 이북에서, 세습무는 한강 이남과 동해안 일대에서 전해졌다. 무속에서 사람과 신령 사이를 이어주는 중재자, 한국에서는 무당을 단골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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