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모든 생물은 전생의 업보를 안고 살아가며 그 업보가 사라질 때까지 윤회한다고 한다. 해탈에 이르러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를 벗어난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하였으며 이 부처가 됨을 성불(成佛)이라 한다. 깨달은 자는 누구든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석가모니불(Gautama Buddha)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불 이외에도 과거불(佛)이 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현재까지 출현한 부처가 총 28명이라고 한다. 미래에는 미륵불이 출현한다고 한다. 샷 카 족의 성자라는 의미에서 “샷 카 무니” 또는 한자를 우리말로 표기하였을 때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불린다. 줄여서 “샷 카” 혹은 “석가”(釋迦)라고 한다. 모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와 관련이 있고 역할에 따라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존, 세존, 석가, 능인 적 묵, 여래, 불타, 붓다, 불(佛) 등 다양하게 불린다. 본명은 싯다르타 가우타마로 “가우타마”는 성이며, “싯다르타”는 이름이다. 가우타마 싯다르타라고도 한다. 싯다르타는 “소원성취” 혹은 “모든 소원을 이루게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성씨인 가우타마에게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라는 뜻의 “붓다(불타 · 불 · 부처)”를 더하여 “가우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조이다. 샷 카 족 국가인 샷 카 공화국(오늘날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서 국왕 수도 다 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 하거나 고행하였다.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필요함을 알았다.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에 정진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Buddha,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에서 여러 경험을 하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다. 쿠시나가라에서 80세 나이로 입멸하였다. 싯다르타는 슈도 다나(Suddhodana 정반 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6세기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카필라바스투(가비라선 중심으로 샷 카 공화국이 있었다. 샷 카 공화국은 일종의 혼합정체가 행해지고 있었다. 하자라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슈 도다 나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왕비가 6개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임신했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임박하자, 당시 풍습에 따라 친정인 데마다 하(Devadaha 구리 성)로 향했다. 음력 4월 8일 룸비니에서 꽃이 만발한 무수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 이때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아름다운 소리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고, 하늘에서 오색구름과 무지개가 피었으며, 주룽이 나타나 몸을 닦아 주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그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치며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켰다. 이는 “우주 안에서 오직 나만이 높다. 삼계가 모두 괴로움이니, 이제 내가 그들을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뜻이다. 싯다르타는 이모인 마하파자 파티(Mahapajapati)의 손에 자랐다. 생후 7 일만야 생모인 마야부인을 열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지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장하면서 진리에 관해서도 명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궁전 안의 편안함이 모든 인간의 생활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궁 밖으로 나와 밭갈이하는 농부를 보고 인간들이 수고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간 사회의 고통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에게 잡아먹히는 벌레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쇠약한 노인을 보고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태어나서 병들어 신음하고 죽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운명에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석가의 이러한 슬픈 심정을 눈치챈 부왕은 혹시 아들이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16세의 나이에 콜리야 왕국의 공주 혼인시켰다. 이후 아들을 낳았는데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이름을 “라훌라(Ra hula)”라고 지었다. 부왕은 많은 미녀들을 시켜 주야로 향연도 베풀었으나, 오히려 출가를 재촉하는 동기만 되었다. 29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밤, 가족에게 무언의 이별을 고한 채 출가하였다.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깨우쳐야 한다고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이 출가에는 여러 동기가 중첩되어 있었지만, 가장 중요했던 요인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다르마를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열망이었다. 불전의 사문유관(四門遊觀) 이야기는 싯다르타 왕자가 카필라바스투 성 동문 밖에서 노인, 남문 밖에서 병자, 서문 밖에서 죽은 자, 북문 밖에서 승려를 만났다는 내용이고 무상고(無常苦)에 대한 강렬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아들 라훌라가 있지 않게 된 싯다르타는 시종 차닉(車匿)을 데리고 백마를 타고서 성문을 빠져나갔다. 싯다르타는 시종과 헤어지고 나서 정신을 통일하려고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결가부좌 유지하는 등 온갖 고행을 하였으나 해탈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브라만 고행자의 가르침을 받아 단식하고 고행하였다. 혼자 성지를 찾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남쪽의 마가다 왕국을 향해 갔다. 삭발하고, 옷 갈아입고 구걸하였다.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ajagrha, 王舍城)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브라만교의 불도를 닦는 사람에게서 요가를 배웠다. 역시 정신적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네란 자나 강(Nairanjana, 尼連禪河) 부근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하였다. 싯다르타가 생존한 당시에는 선정 수행, 고행 수행으로 크게 두 가지 수행법이 존재하였는데 싯다르타는 다양한 고행을 철저히 행동하였다. 한때 부왕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귀국을 권하였으나, 석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부왕은 석가가 돌아옴을 포기하고 5명의 현자를 뽑아 태자를 수행하게 하였다. 이 기간이 6년이었는데,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이 없음을 알고 그만두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하던 5명의 수도자도 떠나갔다. 35세 되는 해의 12월 8일 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 바이샤 카 월의 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고·병·사의 본원을 끊어 없애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 정적(靜寂), 즉 열반의 세계를 체험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을 얻어 눈을 뜬 부처가 된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