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조상은 주나라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다. 공자 3대 전에 노나라로 왔다. 그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유명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았으며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친 안징재(顔徵在) 사이에 태어났다. 숙량흘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아홉 명의 딸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첩과 낳은 아들 공피(孔皮)는 다리에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에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안징재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공자이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었고 안징재는 16세의 소녀였다. 공자 자가 중니(仲尼)인 이유는 집안 장남인 맹 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하는 공자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 속까지 말하고 있으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이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즉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 위해 좋아했다고 한다. 《사기》의 '공자 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 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징재가 공부의 궐리(闕里)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 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누이들과 이복형제 조카에게 상속되었고다.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 결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가난하고 불쌍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다. 그는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려 하였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나였던 노자이다. 대략 열다섯 살부터 공부하기 위해 시작하여, 서른 살에는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섰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한다. 기원전 535년 공자 나이 16세에 모친마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대략 열다섯 살부터 공부하기 위해 시작하여, 서른 살에는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섰다는 것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는 송 (춘추 전국)(宋)나라의 병관(幷官) 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 공자는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다.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다. 봉건제는 종 법제라 한다.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한다.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한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종친들이 된다. 이래서 종법이라 한다. 공자 당시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 혼란했다. 노나라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종 법제를 회복해서, 노나라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그는 학원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되었다.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평민의 자제까지 '묶은 고기' (束脩) 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공자는 등의 경전 활용법을 가르쳤다.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세우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으로 법보다는 덕을 중요시했다. 세상사를 처리하는 데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장하였다. 본국인 주나라의 낙읍을 돌아보고 귀국한 후 그의 명성은 차츰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 수가 훗날 3천명을 넘어섰다. 이에 노나라의 왕 소송은 공자를 눈여겨보고 그를 가까이 두려 하였다. 공자의 인망은 해를 더할수록 거듭 높아져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고(현재의 법무부 장관) 벼슬에 기용되었고 최고 재판관 및 외교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당시 공자는 순장의 악습을 왕에 관하여 끝내 폐지하였다.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씩의 횡포를 꺾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노나라 삼환 계속 가문을 이끄는 수장인 계속 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때쯤, 공산 불 새는 삼환과 계속 사가 권세를 지고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상황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공자 역시 삼환 등의 무리를 몰아내 어지럽혀진 노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이미 일을 꾀했던 상황인지라 도덕 정치 구현에 대한 열망 때문에 반역자 공산 불 새가 하극상을 벌였음에도 그가 초빙했을 때 이에 응하는 문제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노나라 출신 제자던 맹의 자, 남궁도 등의 만류와 때마침 벌어진 상황 여건의 변화로 인해 결국 단념하였다. 공자는 국정 쇄신을 위해 여러모로 계략을 꾸몄으나 일이 성사 단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계속 사의 미움을 받은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를 떠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해 줄 현명한 군주를 찾고자 여정에 나섰다. 10여년이 넘게 걸린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이었다.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힘든 세월이었다.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왕들은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다.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