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古朝鮮) 시대부터 보전되어 오던 원시 종교와 원시 사상의 고유성이 크게 위축된다. 이때 이르러 중국으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유교·불교·도교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은 다투어서 이러한 외래사상을 수용하고, 사회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시작한다.한국의 불교는 1,700여년 전인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중국과 해상 루트를 거쳐 들어온 사상으로서 한국 민족과 자라온 중요한 종교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백제의 침류왕(枕流王) 원년, 신라의 법흥왕(法興王) 14년에 각각 시작된 개화 운동으로 전래하였다. 실제로는 소수림왕 전 시기에 불교가 상당 부분 고구려 각처에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불교를 높이 세운 사람들로는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3대조까지 된 고구려의 승랑(僧朗), 인도에까지 가서 경률(經律)을 가져와 번역한 백제의 겸익(謙益),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불교 이론을 배워와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특징으로 하는 신라 불교를 일으킨 원광(圓光), 자장(慈藏) 등이 있다. 이들에 의하여 삼론학(三論學)·성실론(成實論)·천태학(天台學)·율학(律學)·열반학(涅槃學)·화엄학(華嚴學) 등이 개창되니 한편으로는 불교사상의 황금시대가 준비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에서는 개화를 촉진 시켰다 삼국 시대에 전파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불교는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게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다. 그 특성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상 체계를 요약하여 수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것을 중시하였다. 이는 원효의 일십사상, 신라 말기와 고려 초의 선종 구산, 고려 중기 이후의 오교 영종, 조선 시대의 선교 영종, 현대의 조계종의 출현, 성찰의 돈오돈수 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 불교는 인도나 중국에서 분화되었던 사상을 합치고자 하는 통 불교적 성격의 노력이 컸다. 이는 원효의 화쟁 사상,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의 정혜쌍수의 사상 등에서 보듯이 교종에 속하더라도 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수행하고자 하는 선정 수행을 중시하고 선종에 속하더라도 교가(교종)의 공부를 경시하지 않았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호국불교의 사상적 명맥을 볼 수 있다. 위태로운 때를 당하면 불교에 의지하려는 생각이 깊었다. 호국불교의 사상은 자장의 불국토 사상, 전륜성왕의 이념 확립, 황룡사ㆍ 불국사ㆍ석굴암의 건립, 팔만대장경의 완성,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동 등에서 잘 나타난다.불교는 도입된 이래 삼국의 주요 통치 이념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정치 이념이었던 유교와 함께 가장 강력한 통치 이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불교 교리의 실천을 망각하고 권력화하여 타락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몰락으로 이끈 경향이 짙었고, 조선 초의 배불 숭유 정책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불교의 영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김수온 등의 건의로 이를 부흥시켰다. 신라 말기 도선에 의해 풍수지리설이 유입되었다. 합리적 사고에 눈뜨지 못한 민중 속에 널리 퍼져 각종 미신적인 비기(秘記)와 앞날의 길흉을 예언하는 술법을 낳았고 이에 중국 전래의 음양 5행(陰陽五行) 사상이 서로 어울려서 마침내는 왕도(王都)의 지덕성쇠설(地德盛衰說), 산천압승술(山川壓勝術), 연기설(延基說) 등이 나타난다. 마침내는 귀족들의 정권 싸움에까지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미 신라중, 말기(中末期)부터 한문학과 유학이 융성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유학은 이미 봉건사회를 배경으로 한 정치·사회·철학·문학 전반에 걸친 이념체계로서 과거제(科擧制), 충효 사상(忠孝思想), 명분론(名分論)으로 봉건 사회 정비에 기여했고, 중기에는 교육·문학 등에 크게 활용되어 사학(私學)의 융성, 사장(詞章) 문학의 발달 등을 가져왔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신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고 후기에 새로이 정주학이 도입되어 전통적인 종교와 문학에 충격을 주더니 마침내 진보적인 사상 집단을 형성시켜 조선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정주학의 전래와 함께 정치·교육상의 혁신 사상으로 발전하여 척불론(斥佛論) 또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이 전개되었다. 조선 초기의 유학은 아직 정치, 경제, 법률, 문장에 관련된 이념에 머물렀다. 정도전 등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여러 차례의 사화( 조선 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던 일. ) 이후에 유학자들은 인간의 심성에 주로 관심을 가지며 성리학을 연구하게 된다. 정주계 성리학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사칠론과 이기론이다. 16세기부터 주자학만이 정통을 자처했다. 사단 칠기와 이기의 해석을 둘러싸고 주리파, 주기파로 대립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18세기에 호락 논쟁으로 이어진다. 낙론은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했다. 소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한편 16세기부터 양명학이 논의되긴 했지만 사문난적으로 이단시 되어 철저히 배척받았다. 18세기에 왕양명 계통의 성리학인 양명학(심한)이 소수의 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8세기에 정제두는 퇴계의 양명학 변박에 대해 반론을 펴며 양명학을 옹호하였다. 정제두는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현실 문제에 관한 주자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주자학을 넘어선 학문 연구하기 위해 시작한다. 이것이 실용 학문인 실학이다. 경세치용은 토지제도 등을 강조하며, 이용후생은 상공업에 역점을 둔다. 19세기에는 고증학의 영향으로 실사구시가 강조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정약용의 경학 사상과 최한기의 유기론(唯論)적 경험 철학에서 총괄적으로 합쳐지게 된다. 조선 중기 실학파가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헛된 이론이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사실적인 학문인 실학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헛된 이론이란 성리학을 말한다. 성리학은 고려 말,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에서 크게 발전했으나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때마침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양난 이후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명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는 학계를 크게 변화시키게 된다. 그리고 실학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곧 정치·경제·천문·지리·어학 등에 17세기 이수광과 유형원을 시작으로, 18세기 이익·유수원·박지원, 19세기 정약용·김정희 등의 학자가 일어나 실용적 학문, 즉 실학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