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프리드리히 니체

봄봄82 2024. 3. 12. 15:31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예전의 프로이센(독일)의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인 리켄(Röck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훗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어있었다.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1813-1849)는 루터교회 목사이자 전직 교사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년에 결혼하였다.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는 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죽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 두 하녀들과 함께 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년에 죽자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이사했다.185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는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다.두 친구는 모두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특출한 재능은 언어와 음악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배웠다. 그는 칼  파울 도이쎈,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고대철학과 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신앙도 상실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s)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분노하였다. 독일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독일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는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찾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실제로 그는 안티크리스트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망상으로 도덕이나 종교, 문화, 역사 등을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왜곡했다고 말했다. 이는 유대인 혐오의 근거가 되기도 했는데, 니체에 의하면 유대인은 세계의 외면은 물론 내면도 포함해 모든 것을 사기날조로 전복하는 운명적 민족이자 노예 혹은 약자로서 중요성이 있으며 귀족 같은 정신을 가진 고귀한 자들의 진정한 적이다. 그러나 니체는 강자의 입장을 찬양하면서도 때때로 약자의 도덕 등을 높여 세우기도 해서 모순도 있다.기독교와 관념론은다 세계를 두 개로 구분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 이외에도 하늘나라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나눈다.니체는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장하며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였다.   니체는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멸망적 교리만을 전했다며 기독교를 비판했 니체는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멸망적 교리만을 전했다며 기독교를 비판했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니체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을 읽었다.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다.그는 두 사람의 작품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분야까지 넓혀가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군에 자원한다. 1867년 10월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철학과 군복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도중, 한 꿈을 꾸게 된다. 내용은 어떤 시집을 읽었다는 것인데,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것을 기억해내 전쟁과 싸움을 잊고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철학공부에 정진하게 된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 해 동안 복무하였다.그러나 1868년 3월에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가슴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는 군복무를 5년 이상 하였고, 높은 직위에도 올랐었다.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다시 학업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열중하였다. 1868년 10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35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퇴직한 이후 그는 강연도 그만두었다.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글 쓰는 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하고 만다.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겼다.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묻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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