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풍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훈고학은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하였다. 그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유교 경전에 담긴 공자나 맹자 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되었다. 송나라 때 이르러 두 성인이 지은 문장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따라서 학자들은 수, 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것은 훈고학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던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많은 주석서와 탁본들을 교차 비교 검증하여 문장의 본의 미에 맞게 해석하고 책들을 새롭게 편집하여 새 경전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사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위해 시작했다. 주자학은 왕이 집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위해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세월이 흘러 주자학에 대한 주석서가 만들어지고 주자학을 근본으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이 만들어져 학풍은 오히려 훈고학이 성행하던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어 버린 것이다.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치양지(致良知) · 심즉리(心卽理) · 지행합일(知行合一 양명학의 3 강령이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 주석한, 윤리학, 방법론 등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유교에서는 윤리학적인 면을 가장 중요시 하였는데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던 학파였다.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군주들의 황권, 왕권 강화의 재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왕수인은 다시 도덕적 윤리를 되살리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다.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왕수인의 제자들은 양명학을 많이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공자가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방식을 따라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습성이나 재질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 그 뒤 양명학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나갔다. 양명 우파는 정통파로 간주하였다. 귀적파와 수증파가 우파에 속한다. 양명 좌파는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양명학은 청나라 시대부터 쇠퇴하기 위해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위해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양명학이 부활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위해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박상(朴祥, 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 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천하여 십청(十淸) 김세필(金世弼, 1473~1533)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 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일어난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유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비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다.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걸,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양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류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구체적으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반대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도입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은경(1529년 1월 5일(음력 1528년 11월 25일)~1594년 7월 13일(음력 5월 26일)과 이유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동(1587~1638), 최명길이 적게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동은 조선 유 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