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아리스토텔레스

봄봄82 2024. 3. 10. 16:43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 ~ 322년)는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 정치, 윤리학, 도덕 과학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며 플라톤의 제자이다.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으며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미학과 도덕, 논리와 과학, 형이상학과 정치를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다.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 시키는 그것으로 보았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 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하였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진정한 학문으로 인정되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초대교회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영향을 주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년~1400년까지의 중세 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방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표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 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북부 핥기 지기 반도에 위치한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 게이라는 것에서 태어났다. 모친인 파이 스티스는 칼 키스의 이민 출신이고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다. 왕자 필리포스 2세의 소꿉동무로 왕실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기원전 367년)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 시까지 약 20년 동안 그곳에서 학생 지도를 담당하며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 몹시 사납고 세차게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 그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 자러 갔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다.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 제도의 수집이나 기록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 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을 열심히 하는 애국자였다.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 융합 정책에는 찬성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 게이 로스로 물러가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하고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왕은 암살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 카오스 성역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이나 시온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이 학교는 리 케이온이라 불리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지난 일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 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특히 생물학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문이 의사 가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그의 배경이 영향을 주었다. 두 정신의 견제 가운데서 존재 내지 실체의 포착 방법에서도 그의 사색은 말하자면 양극 사이를 항상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플라톤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데아론을 엄격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존재론이 형성돼 오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면이 완전히 떨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북돋아 높이는 것에 초점을 둔다. 에우다 이모니 아(Eudaimonia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한편 정당성(Justice) 즉 '정의'(正義)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 제5권 정의론에서 정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평등'(equal)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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